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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재정준칙? 없는 것만 못하다"

정치논리가 뒤흔드는 대한민국 건전 재정

미디어이슈 | 기사입력 2020/09/22 [15:08]

"유연한 재정준칙? 없는 것만 못하다"

정치논리가 뒤흔드는 대한민국 건전 재정

미디어이슈 | 입력 : 2020/09/22 [15:08]
강길모 미디어이슈 고문


(장면1) 상당기간 기재부를 출입하던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다, 작년 하반기만 하더라도 재정지표가 나올 때마다 관련 과장들이 브리핑을 자청해 재정건전성 악화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언론을 설득하려 애썼는데, 올해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네......”

 

포기했다는 말이겠지요. 그동안 대한민국의 재정건전성이 나름의 수준을 유지해 온 데에는, 재정을 다루는 경제 관료들의 소신과 원칙주의가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국가채무비율 40%선을 절대 넘어서는 안 될 마지노선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정치권의 흔들기에도 나름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2016년 기재부가 국회에 제출했던 재정건전화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채무비율은 45%를 상한선으로, 재정수지 적자는 연 3% 이내로 못 박는 내용이었습니다. 재정 당국자들의 견해가 갑자기 변할 리가 없을 텐데, 이제는 최소한의 대언론, 대국민 설득노력조차 포기했다면 결국 경제 관료들이 정치논리에 완전 굴복했다는 실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 법안이 통과되었을 경우, 이 정부는 틀림없이 거대여당 쪽수의 힘으로 그 법부터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그 재정건전화법을 깨부숴야만 하는 정부여당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법이 있었다 해도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법이 있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보다 심층적인 판단의 기회라도 얻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국민들에게 재정적자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와 판단의 기회가 실종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정적자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빚이고, 그래서 국가채무는 반드시 국민의 이해와 동의가 수반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정치논리에 무력하게 굴복한 재정당국의 관료들입니다. 지엄하신 문대통령께서 ‘40%선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고 경제 관료들을 압박한 이후, 누가 감히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재정당국은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지속적으로 지출구조조정 등을 통하여 국가채무증가를 최대한 억제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요 국가적 의무입니다. 계속된 직무유기가 불가피하다면 밥숟갈을 놓아야 되겠지요. 

 

(장면2) 지난 5년간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살펴보던 어느 경제학자의 탄식. “아니 무슨 놈의 계획이란 것이 매년 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차이가 커서야 어떻게 계획이라고 할 수 있나? 차라리 운용계획이라고 하지 말고 기상청처럼 ‘장기 예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나? 어차피 맞지도 않을 것이고, 맞출 생각들도 없어 보이는데......”  

 

국가재정운용계획이란 재정운용의 효율성과 건전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당해 회계연도를 포함한 5회계연도에 대한 중기적 재정운용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재정운용계획을 말합니다. 2006년 국가재정법 제정으로 국회 제출이 의무화되었으며, 현재 정부는 내년 예산안과 함께 '2020~2024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최근의 국가채무에 대한 재정운용목표치의 변화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2016~20년 계획 : 40% 초반 수준 관리
2018~22년 계획 : 40% 초반 수준 관리
2019~23년 계획 : 40% 중반 수준 관리
2020~24년 계획 : 50% 후반 수준 관리

 

정부당국이 재정운용관리의 목표치를 제시하는 것은, 그렇게 나라살림을 운영하겠다는 실천의 목표요 국민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매년 큰 폭으로 뒤흔들면서 이렇다 할 변명조차 없고, 나중에 악화된 재정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의지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으니 황당할 따름입니다. 

 

기상청의 장기 예보가 틀리면, 욕은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예보는 예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상청이 만약 장기날씨운용계획이란 것을 내놓고, 향후 5년간의 온도, 습도, 태풍 횟수 등에 대한 관리운용 목표수치를 제시했다면, 그 결과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재정당국이 국민들에게 내놓는 재정운용목표가 무슨 장기 예보도 아닐진대, 실천은 고사하고 예상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빚고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정치논리에 휘둘린 재정당국자들이 아예 관리의지를 포기한 상태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OECD국가들 중에서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터키와 우리나라 둘 뿐입니다. 사실 터키와 달리 우리 대한민국은 그동안 ‘재정 준칙’이 없어도 되는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만큼 역대 재정당국자들의 소신과 의지가 출중했고, 그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무지막지한 포퓰리즘 정권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IMF사태의 경험은 재정건전성에 대한 국가구성원 전체의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것이 경제 관료들의 재정건전성에 대한 원칙과 소신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엄존하는 국민적 합의를 과감하게 깨부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빚의 나라’로 돌진한 것, 그것이 ‘코로나 때문’이란 변명으로 언제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요? 

 

이 엉터리 국가재정운용계획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이 있습니다. 바로 ‘재정준칙’의 제정입니다. 2016년 기재부가 제출했던 재정준칙은 국회에서 유야무야 실종됐지만, 몇몇 의원들이 제기한 재정준칙 법안들이 현재도 국회에서 주무시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채무 폭증에 대한 우려를 조금이나마 불식하고, 국가재정 건전화의 희망과 불씨를 살려가기 위해서는 ‘재정준칙 법제화’가 긴박하고도 절실한 과제입니다. 기재부장관이 수차례 걸쳐 ‘재정준칙’ 마련을 약속했지만 계속 늦어지고 있습니다. 늦어지고 있는 이유는 뻔합니다. 

 

2016년 제출했던 법안 수준의 재정관리 목표치에 대한 법제화는 이미 물 건너갔고, 현 상황을 반영해 준칙을 마련하자니 남의 나라 얘기 같았던 EU의 권장목표(국가채무비율 60%, 재정적자 3%)조차 넘겼거나 넘어설 것이 분명한 마당에, 원천적으로 국민들이 납득할 수준의 ‘준칙다운 준칙’을 만들 수가 없게 된 것이겠지요.

 

경제부총리는 마지못해 ‘유연한 준칙’을 만들겠다고 미리 엄살을 떨고 있습니다. 준칙이란 것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유연한 준칙’이 도대체 뭔 얘기인지......안 봐도 뻔한 얘기란 말씀이지요. 준칙의 흉내만 내고, 실제론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을 그런 내용으로 가겠다는 사전 통보나 다름없다 할 것입니다. 

 

이 정부 들어서서 5년 단위 국가재정운용계획이란 것이 어떻게 망가져왔는지 살펴봤습니다만, 그 것을 개선하기 위한 ‘재정준칙’을 제정한다면서, 또 다시 유명무실한 재정준칙이 만들어진다면 코로나 위기를 핑계로 국민을 두 번 우롱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재정확대와 그에 따른 국가채무 증대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신비 2만원’ 논란에서 보듯 지금처럼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상황이라면 무분별한 재정확대와 국가채무 폭증이 초래할 국가적 재앙에 대해 국민적 합의로 제동을 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엄정하고 실효성 있는 ‘재정준칙’의 제정입니다.

 

경제팀 수장이 ‘재정준칙’을 발표하기도 전에, ‘유연한 준칙’ 운운한 것은 그래서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EU가 권장하는 수준의 언저리에서라도 준칙다운 준칙을 만들어야만합니다. 독립적 국가재정기구를 만드는 것도 적극 검토되어야 합니다. 

 

‘국민의 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발한 제1야당도 ‘준칙다운 재정준칙’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통해, 여당을 ‘국민의 힘’으로 견인할 수 있어야 새로운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코로나 대응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풀고 있고, 추가로 돈을 풀겠다는 입장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선거를 앞둔 공화당 출신 대통령과 민주당이 추가투입 재정 확대를 주문하고 있는 반면,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이 추가 재정확대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정을 많이 풀고 적게 풀고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정책을 다루는 정치권의 태도와 구도가 미국이란 나라의 미래를 그나마 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당과 청와대의 긴장과 균형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사정을 돌아보면, 참 부럽기도 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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