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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정치담론의 천박함"

16년간 업그레이드된 ‘당동벌이’ 대한민국

박종완 기자 | 기사입력 2020/11/21 [14:03]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정치담론의 천박함"

16년간 업그레이드된 ‘당동벌이’ 대한민국

박종완 기자 | 입력 : 2020/11/21 [14:03]
강길모 미디어이슈 고문


2004년을 마감하면서, 당시 교수신문이 선정했던 올해의 사자성어가 당동벌이(黨同伐異)였습니다. 벌써 16년이 지난 얘기입니다만, 2020년을 규정할 사자성어로 다시 이 말이 꼽힌다고 해도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공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생각이 같거나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黨同)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사회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다원성이 존중되어야 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로 다른 패거리끼리 지나친 적대의식으로 무장하고 사생결단식 무한투쟁’(伐異)이 강박되는 것은 병든 사회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같은 사람들끼리 ‘진영’을 구축하고, 구성원들끼리 소통과 합의를 통해 나름의 ‘진영논리와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권장할 일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사회에서는 ‘진영논리’라는 괴물이 생산적 담론을 원천봉쇄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권력에 눈이 먼 소인배적 진영담론은 넘쳐나지만, 국가공동체 전체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에서 도출되는 생산적 정치담론이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폭력화된 진영논리는 사회적 갈등을 필요이상으로 증폭시키고, 그로 인해 서로 다른 진영 간에 폭발적 수준의 증오, 혐오, 분노, 멸시 등으로 극한대결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16년 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대한민국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 빈곤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산업화’ ‘민주화’라는 양대 담론이 결정적 좌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1990년대 이후에도 ‘세계화 담론’이나 ‘복지국가 담론’ ‘사민주의 담론’ 등이 대한민국의 방향성과 관련한 담론 시장을 달군 바 있었습니다.

 

엊그제 YS 5주기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YS시절에 전격적 금융실명제 발표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외국 순방에서 돌아 온 YS가 느닷없이 ‘세계화 담론’을 외쳤을 때였습니다. 3당 합당에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통합이라는 명분을 부여했던 YS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의 국가적 비전이자 담론으로 ‘세계화’를 내걸었던 것이었습니다.

 

YS의 세계화 담론은 산업화, 민주화 이후의 국가적 테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제법 의미 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당시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에의 굴복 선언’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나름의 논리구조로 대응했습니다. 세계화 전도사를 자처했던 YS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박세일은 그 이후에도 ‘선진화 담론’ ‘공동체자유주의론’ ‘선진통일론’ 등을 제시하며 양대 진영 간의 담론투쟁을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살벌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전쟁터로 전락한 데에는, 궁핍한 진영논리에 갇혀 품격 있는 정치담론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숲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나무에만 집착하는 진영논리적 담론투쟁의 저급성과 천박함이 대한민국의 품격을 갉아먹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운명’까지 위협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치담론의 천박성에 대한 근본적 책임은 집권세력에게 먼저 물어야만 합니다. 현 정권이 제기하고 있는 ‘적폐청산론’ ‘정략적 검찰개혁론’ ‘시대착오적 항일투쟁론’ ‘북핵 용인형 평화우선론’ 등은 국가공동체 전체를 위한 담론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거나, 벗어나고 있습니다.

 

다수결 원칙의 폭력성을 외면하며, 국민 통합이 아닌 편가르기식 국정에 경도된 채, 대한민국 공동체가 함께 지향해야 할 미래지향적 좌표나 담론을 선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집권세력의 직무유기요 무능이라고 규정해야 마땅합니다.

 

최근 제기한 ‘한국판 뉴딜’이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국가채무가 위험수위에 이르고, 국민통합의 에너지가 실종된 상태에서 20조 안팎의 뉴딜정책이 과연 이 나라의 미래에 무슨 희망을 불러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비집권세력, 특히 제1야당의 철학적 빈곤은 집권세력의 종파적 분열주의에 의한 폐해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정치담론을 시궁창에 빠뜨린 주범입니다. 원칙 없는 좌클릭과 ‘좌파 이슈 선점하기’ 등은 대중추수주의의 전형일 뿐입니다. 불가피하게 전술적 꼼수에 매달린다 하더라도, ‘전략적 담론시장’을 외면해서는 대중적 외연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2006년 스웨덴의 젊은 보수당 지도자 라인펠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복지 아젠다에서 일부 좌클릭을 단행하면서도 국가경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수적 가치들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보여주며 국민에 대한 설득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담론은 대국민 설득의 내용이면서 무기입니다.

 

하와이대 미래학자인 손현주 박사는 ‘대안미래’를 설명하면서, 한국사회의 팬덤문화 등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에서 온다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미래사회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한 미래사회 논의 등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집단 간 소통이 원활한 열린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기술 혁명을 통해 비용이 ‘0’에 도달하고 협력적 소비가 가능한 ‘한계비용 제로사회’, 첨단 기술이 몸속에 들어와 인간과 사물의 연결이 가능한 ‘의식기술시대’, 생산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연과의 조화 및 단순한 생활을 진보로 간주하는 ‘탈성장’ 사회, 가치·목표·지각 등이 중시되는 ‘영감의 시대’(Spiritual Age)......”

 

우리나라의 정치담론이 ‘대안미래’ 수준에서 갑론을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작금의 저급성에 비춰 터무니없는 기대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탈원전 정책’이나 ‘동남권 신공항’ 등 국책사업을 다루면서까지 온통 정치적 꼼수 논쟁에 매몰되고 있는 현실은 참 곤란합니다.

 

미 대선이 끝났다는 것인지, 아직도 진행형인지 혼란스럽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결 수위가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의가 별로 없는 듯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벌써부터 중국은 시진핑 개인영도체제를 다지면서 미국의 공세에 대응할 내수중심, 기술력중심의 미래 전략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시진핑 사상’이란 이름으로 21세기형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자국민 통합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중국몽’ ‘일대일로’ 등 다양한 국가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만만치 않습니다. 비록 트럼프의 억지 행태로 미국 민주주의의 체면이 손상되긴 했다지만, 중국을 ‘중국공산당’이라고 지칭하면서 국제 규범과 개방적 세계질서의 파괴자로 중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 담론을 앞세워 중국을 포위할 ‘가치동맹’ 확장의 명분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미중간 신냉전시대를 겨냥해 우리 대한민국의 좌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국가적 미래 담론이 절박하건만, ‘종북 빨갱이’와 ‘토착왜구’로 압축되는, 우리 정치권의 이 천박한 담론시장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신공항 이름이랍시고 ‘노무현 공항’ ‘오거돈 공항’ ‘문재인 공항’ 등을 주절거리며, 국가적 담론의 품격을 습관적으로 짓밟는 자들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수를 들이켜야만 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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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1 [14:39] 수정 | 삭제
  • 세상이 어떻게 이지경으로 가고 있는지 개탄할 노릇이다 좌파정권에는 공정과평등이 적어보이고 좌파정권을 위한 정책으로 불합리한 엉떠리 다수결 비민주주의 기득권 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역사에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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